화가 밀레 이야기 : 성공을 안겨준 그림 01-2

 

밀레에게 성공을 안겨준 ‘농민 그림’

밀레의 성장 이야기에서 이어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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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친구들

1845년경 밀레는 파리의 로슈슈아르 Rochechouart 거리에 정착합니다. 저렴한 집세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밀레는 훗날 바르비종로 불리게 되는 화가들과 친분을 쌓아갑니다. 그중 테오도르 루소 Théodore Rousseau와는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가 됩니다.

 

평생의 후원자, 알프레드 상시에

그리고 밀레를 세상에 알리는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후원자 알프레드 상시에 Alfred Sensier를 만납니다.

그는 밀레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판매하며 밀레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는 상시에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무르익어 갔고, 선의와 명분만으로 인간관계가 유지되길 바란다면 이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던 시대입니다.

후원자 ‘상시에’가 집필한 「밀레 전기」

그가 밀레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은 「밀레 전기」 집필입니다. 비록 완성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지만, 밀레와 평생 주고받은 편지들과 일화들을 정리한 그의 글들은 이후 다시 정리되어 1881년 출판됩니다.

고흐가 사랑한 밀레의 소묘들

많은 화가들이 읽은 이 책은, 특히 빈센트 반 고흐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고흐_낮잠-밀레 작품모사_1889~90
빈센트 반 고흐 [ 낮잠 (밀레 작품모사), La Méridienne, 1889~90, 캔버스 · 유화, 91×73㎝, 파리 · 오르세 미술관 ]

고흐는 동생 테오와의 편지에서 종종 「밀레 전기」를 인용하며 밀레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합니다. 책이 출판되기 전부터 그의 소묘를 즐겨 묘사했던 고흐의 그림에는 밀레의 흔적이 고흐만의 표현 방법으로 잘 녹아있습니다.

 

주머니를 채워준 ‘누드화’

무엇보다 금전의 이해관계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부의 축적에 더욱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청빈과, 도덕과, 신앙을 최고의 가치라고 말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이기심과는 무관한 듯한 때 묻지 않은 농촌의 모습을 도시의 부르주아들은 보고 싶어 했습니다.

상시에는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았고 화가 밀레의 모습은 그것에 부합되도록 잘 다듬어 졌습니다.

‘상시에’가 만들어낸 밀레의 모습들

밀레가 자신이 그린을 누드화를 부끄러워했다는 일화도 상시에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누드화는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분야입니다. 밀레의 누드화가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아마도 더 많은 누드를 그렸을 지도 모릅니다.

밀레  _ 누워있는 여인의 누드 _ 1844-5
장-프랑수아 밀레 [ 누워있는 여인의 누드, Femme nue couchée, 1844~5, 캔버스 · 유화, 33×41㎝, 파리 · 오르세 미술관 ]

 

비범한 & 평범한 밀레의 모습들

상시에의 글은 지금도 밀레의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일화를 과장되게 부풀리거나 감상적으로 표현해 밀레의 삶을 왜곡하고 우상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상시에의 노력으로 좀 더 쉽게 밀레라는 화가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으로 비범한 천재의 모습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던 인간 밀레의 모습들이 하나둘 발견되고 있습니다.

 

성공을 안겨준 ‘농민 그림’

밀레의 그림은 1848년을 전후로 크게 바뀝니다.

점차 ‘농민그림’에 집중하는 밀레

과거 대가들의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질감과 색감이 자리를 잡아갑니다. 주요 소재도 부르주아의 초상, 고대 신화, 누드가 점차 줄고 ‘농부들의 일상’이 증가합니다. 어린 시절 목탄으로 즐겨 그렸던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이제 전문 화가의 손끝에서 유화로 무르익어갑니다.

 

2월 혁명 :  선거권을 획득한 농민들

이 시기는 다시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1848년 2월 혁명은 성인 남자 모두가 선거에 참여하는 세상을 만듭니다.

밀레의 아버지는 누려보지 못했던 권리입니다. 밀레의 어머니와 아내는 여전히 여자라는 이유로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밀레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자신의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도시는 어느때 보다 거대해졌지만, 여전히 프랑스 인구의 70% 이상은 농민이었습니다. 이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농민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집단이 됩니다.

 

높은 가격에 거래된 밀레의 ‘농민 그림’

1848년 3월, ‘살롱’에 출품 한 [ 키질하는 사람, 1847~8경 ]은 호평을 얻으며 밀레를 유명화가로 만들어줍니다.

밀레 _키질하는 사람 _ 1847-8 _ 런던
장-프랑수아 밀레 [ 키질하는 사람, Un vanneur, 1847~8, 캔버스 · 유화, 100,5×71㎝, 런던 · 내셔널 갤러리 ]

시대의 분위기가 밀레에게 ‘농민’을 그리게 했을 수도 있고, 후원자이자 간섭자였던 상시에가 당시의 정치 흐름을 반영한 그림을 그리도록 밀레를 독려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건 이전과는 다르게 긴박하게 진행된 정치 상황을 고려한 그림을 밀레가 그렸다는 겁니다.

밀레만의 스타일과 시대상이 반영된 그림의 주인공 ‘농민’은, 빨간 두건과 하얀 셔츠 그리고 파란 천으로 무릎을 감싸고 있습니다. 2월 혁명의 주역 ‘농민’과 공화국의 상징 ‘삼색기’를 그림에 투영한 밀레의 전략은 주요했습니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은 500프랑이라는 높은 가격에 [ 키질하는 사람 ]을 구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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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먼저 정치인들이 ‘농민 그림’을 주목했습니다.
밀레의 ‘농민 그림’에 스며든 정치적 메세지 (다음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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