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밀레 이야기 : 대통령 선거 & 밀레의 ‘농민 그림’ 02-2

184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밀레의 ‘농민 그림’

밀레가 경험한 ‘2월 혁명’에서 이어진 글입니다.
← 정치인들이 주목한, 밀레의 ‘농민 그림’

 

임시정부, ‘보통선거’ 법안 승인

‘성공한 사람’의 훈장 = ‘선거권’

선거제도가 도입된 후에도 오랫동안 선거는 일정한 재산을 모은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들의 빠른 성장과 함께 자수성가한 사람들도 늘어납니다. 유권자 수는 점차 증가했고 성공한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세상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정치 · 경제’의 진보는, 부르주아들의 자부심이자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프랑스 선거 자격 : 남성, 25세 이상, 200프랑 이상 납세자

프랑스의 유권자도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기준을 충족한 사람은 전체 인구의 1%를 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 · 농민 · 부르주아가 함께 국왕을 몰아냈지만, 새로운 정부의 구성은 언제나 부르주아가 독점합니다. 이제 노동자와 농민들은 지난날의 공화국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공화국’을 원했습니다.

‘ 전 국민에게 선거의 권리를 ! ’

2월 혁명(1848년)의 주요 이슈였던 ‘보통선거’는 많은 시민의 지지를 받습니다. 광장에서 연설한 이들은 여전히 좀 더 배운 부르주아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연설가 중에는 노동조합의 대표도 여럿 있었고 그들은 사교계의 언어가 아닌 노동자의 언어로 연설했습니다.

다양한 계층이 ‘참정권’ 운동을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1848년 3월 5일 ‘성인 남성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 되며 결실을 거둡니다.

프랑스 유권자 변화

  • 1831년 총선 : 166,000명 (7월 혁명 이후)
  • 1846년 총선 : 241,000명
  • 1848년 총선 : 9,395,035명 (첫 보통선거)
  • 1945년 총선 : 여성 유권자 참여 (1944년, 2차 세계대전 후 임시정부는 조례를 통해 여성 참정권을 법적으로 보장)

 

임시정부, 밀레의 ‘농민 그림’ 구입

2월 혁명 직후 밀레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노고를 기념하듯 [키질하는 사람]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그 그림은 ‘밀레의 노고’에 보답하듯 밀레를 성공으로 이끕니다.

밀레-키질하는 사람-대통령 선거

비슷한 시기 그려진 3점의 [키질하는 사람]

    1. 1847~8년, 런던-내셔널 갤러리, 100.5×71㎝ (1848년 3월 살롱에 출품, 임시정부 내무장관 구입)
    2. 1848년경, 파리-루브르 박물관, 38×29㎝
    3. 1848년경, 파리-오르세 미술관, 58.5×79.5㎝

 

밀레 그림의 주인공 = ‘평범한 농부’

밀레는 혁명 직후 열린 살롱전 Salon de Paris에 [키질하는 사람]을 출품합니다.

그림 속에는 평범한 농부가 단지 ‘‘을 하고 있었습니다. 역사 속 영웅과 신화의 주인공으로 가득한 살롱에서, 밀레가 그린 ‘평범한 농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평론가들은 평범한 사람도 예술의 주제가 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평단의 좋은 평가 속에서 [키질하는 사람]은 고액에 거래됩니다.

밀레의 그림을 구입한, 개혁 추진 세력

[키질하는 사람]을 구입한 르드뤼 롤랭 Alexandre-Ledru-Rollin은 임시정부에서 ‘보통선거’ 법제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내무장관이었던 그는 새로운 공화국의 미술교육과 박물관들의 방향을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주제 의식’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밀레의 그림은 ‘새로운 공화국’의 성격을 알리는데 매우 적합한 문화 아이콘으로 선택됩니다.

계속되는 밀레의 성공, 정부의 그림 의뢰

밀레의 ‘농민 그림’은 정부 정책에 힘입어 여러 장소에서 전시됩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화가 밀레’가 대중에게 알려지며, ‘농민 화가 = 밀레’의 이미지가 하나둘 만들어집니다.

성공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1,800프랑의 지원을 약속했고, 밀레는 [건초 만드는 사람들의 휴식, 1848]을 그려 정부에 기증합니다. 

밀레 _ 건초 만드는 사람들의 휴식 _ 1848 선거
장-프랑수아 밀레 [ 건초 만드는 사람들의 휴식, huile sur toile, 1848, 캔버스 · 유화, 116×89㎝, 파리 · 오르세 미술관 ]

밀레는 이 시기를 전후로 ‘농민 주제’에 전념하며, ‘농민 화가’로 확고하게 자리 잡아 갑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친농민’ 이미지 만들기는 참담하게 실패합니다.

 

양분된 혁명 세력 : 사회주의 vs 자유주의

이전 혁명들의 대결 구도는 ‘공화제 vs 군주제’였습니다.

그 대결의 최대 수혜자는 부르주아였습니다. 그들을 이끈 가치관 ‘자유주의’는 ‘능력으로 출세하는 세상’을 만들어냅니다. 귀족이 독점하던 출세의 기회가 신분의 속박을 깨고 모두에게 열리게 됩니다.

노동자들도 자신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생산력은 계속 증가했고 공장의 규모는 커져 갔습니다. 하지만 노동자가 출세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본가들은 귀족들이 살던 저택을 구입했지만, 노동자들은 부르주아가 지은 집에 세들어 살며 조금 오른 급여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자유주의’는 노동자의 이념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공화국을 원하게 됩니다. 어느덧 혁명의 흐름을 만드는 사람들은 더 이상 부르주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Proletarier였습니다.

사회주의 vs 자유주의

2월 혁명(1848년)을 수습하던 임시정부는 사회주의 vs 자유주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세력은 친노동자 성향의 정책을 추진했고, 자유주의 세력은 친자본가 성향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노동자들의 강력한 결집을 보여준 2월 혁명은, 임시정부 내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줍니다.

노동자 vs 자본가

노동자들은 노조 허용, 근로 시간 제한 등을 요구했고, 자본가들은 더 높은 생산력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사회가 더욱 개혁되길 원했고, 자본가들은 이제 사회가 안정되길 원했습니다. 그들의 바람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사회주의 세력 vs 자유주의 세력으로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함께 국왕을 몰아냈지만, 그들이 그린 국가의 모습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농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 혁명 주도 정치인들

2월 혁명의 주요 이슈는 ‘보통선거’였지만, 혁명을 촉발시킨 것은 불황이었습니다. 1846년 흉작 → 식양부족 · 물가상승 → 1847년 불황 · 실업 → 1848년 2월 혁명

혁명 후에도 농민과 노동자는 여전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경제 위기 대처는 임시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시민들은 ‘국왕’의 무능함을 단죄했고 그 이후를 기대했습니다. 이제 정치인들은, 왕의 ‘무능함’ 대신 공화국의 ‘유능함’으로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습니다.

도시 문제 해결에 집중된 정책들

혁명 직후 실업자 대책은 신속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 사업장 등에서 실업자를 고용해 임금을 지급하는 ‘국립 작업장 Atelier nationaux‘이 운영됩니다. 불황으로 직장을 잃고 삶의 기반이 흔들린 노동자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다수였지만, 소수자였던 농민

정부도 농촌의 문제 해결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책 방향은 농민의 어려움 해결에 앞서 도시의 경제와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됩니다. 신속히 시행된 정책들의 수혜자는 도시 사람들이었고 농촌 사람들은 조금 더 견뎌내야 했습니다.

임시정부에는 노동자 출신 정치인도 (알렉상드르 마틴) 소수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농민의 참여는 없었습니다. 농민은 다수였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은 소수가 되지도 못했습니다.

농민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 정치인들

내무장관이 ‘농민 그림 [키질하는 사람]’을 구입하고, 정부가 ‘농민 화가’들을 지원하는 등, 농민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농민이 주인공인 그림이 등장했지만, 농민들이 그림을 감상하는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림 · 예술 · 문화생활은 아직도 시골의 농민들에겐 너무 먼 곳의 이야기였습니다.

1849, 파리 살롱전 풍경
Féodor Hoffbauer [ 1849년 파리 살롱전 풍경 ]

농민을 그린 ‘밀레’ 그리고 그의 그림을 구입한 ‘정치인’도,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진심으로 걱정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축하하고 격려한 전시회에, 농민은 그림으로만 참여했습니다. 밀레의 ‘친농민’ 이미지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차곡차곡 쌓여갔지만, 농촌 사회에서 정치인들의 ‘친농민’ 이미지는 쌓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교계의 언어로 농민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 감사는 진심이었겠지만 그 표현은 농민들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첫 ‘보통선거’ 실시 : 4월 ‘제헌의회’ 선거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 정부입니다. 의회 구성 후 헌법을 제정하고 → 대통령을 선출해 → 정식으로 행정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4월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였습니다. 이 선거에서 선출된 의원들의 첫 임무는 국가의 기초인 ‘헌법제정 = 제헌’하는 것입니다.

헌법을 만든다는 것은 국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4월 선거에서 승리한 세력의 이데올로기가 헌법에 강하게 반영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보통선거 vs 재산에 따른 선거

2월 혁명 후에도 ‘보통선거’ 도입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자유주의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정 수준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실하게 재산을 모은 자본가들이 보기에 ‘빈민’은 = ‘게으른’ 사람들이었고, ‘가난’은 = ‘성실하지 못한 삶’의 결과였습니다.

성실하게 자신의 생활을 돌보지 못한 사람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농민 지지를 예측한, 온건 자유주의 세력

자유주의자들은 농민들의 투표권 행사도 못마땅했습니다. 복잡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교양을 쌓지 못한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것이 납득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이 대거 참여하게 되는 ‘제헌 의회’ 선거를 서둘러 진행한 세력은 ‘사회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였습니다.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온건했고, 여전히 국왕과 성직자, 그리고 고을의 덕망 있는 가문에게 친밀함을 느꼈습니다. 2월 혁명에서 ‘참정권’을 위해 목소리 높였지만, 농민들은 사회 개혁에 앞서 굶주림 없는 평화로운 마을을 더 원했습니다.

농민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진한 이들은 사회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설명을 이해하고 공감한 농민들은 너무도 적었습니다.

정책 홍보 부족 & 선거 연기

농업은 어느 직종보다 오랜 경험이 존중됩니다. 새로운 농업기술이 과거의 생산량을 압도했지만, 여전히 농민들은 마을의 문제를 학교 선생님 보다 교회 신부님과 상의 했습니다. 농민들에게 사회주의자의 이미지는 인자한 신부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농민들은 급진 사회주의자보다 온건 자유주의자에게 마음이 기울었고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정치인들은 위기감 속에서 선거일 연기를 주장합니다. 선거는 한 달가량 연기됐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선거 연기 시도가 다시 있었지만,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4월 25일~26일)

결과는 모두가 예측한 대로 사회주의 세력의 참패였습니다.

4월 ‘제헌 의회 선거’ : 온건 자유주의 압승

4월 총선에서 농민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닌 자유주의자를 지지합니다. 보통선거가 도입된 상황에서 국민의 70% 이상인 농민의 지지는 = 선거의 승리를 뜻했습니다.

자유주의 세력은 압승했고, 사회주의는 국왕의 통치를 지지했던 세력에게도 밀립니다.
아직 오늘날 같은 정당 조직은 없었습니다. 선거 결과는 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보통 아래와 같이 분류됩니다.

  • 600석 – 온건공화파 Républicains modérés : 온건 자유주의
  • 200석 – 질서당 Parti de l’Ordre : 보수주의 · 군주주의 · 과거 왕당파
  • 80석 – 산악파 Montagne : 사회주의 · 급진개혁

 

선거 후, 시민에게 총을 겨눈 정부

폐기된 노동자 보호 정책들

사회주의 정당이 참패하자 노동자에게 유리한 정책들이 폐기되거나 보류됩니다. 실업자를 위해 운영되던 ‘국립 작업장’은 비용 문제로 폐쇄됩니다. 크고 작은 운영 문제가 있었지만, 투입된 비용은 정부 예산의 1% 미만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격렬히 반발합니다. 바리케이드가 다시 등장 했고,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합니다. 4일 동안 4,000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 6월21일 . 국립 작업장 폐지 → 22일 . 파리 여러 곳 산발적 시위
  • 23일 . 노동자들 바리케이드 설치 → 정부군 투입 → 1,500명 사망 (그 중 2/3는 진압 명령을 수행하던 병사들)  
  • 26일 . 집압 종료, 진압 후 정부는 약 3,000명을 학살, 12,000명을 체포 (4,000명을 알제리 노동 캠프로 추방)
메소니에_바리케이드_1850경
에르네스트 메소니에 [ 바리케이드, La barricade, rue de la Mortellerie (juin 1848), 1850경, 캔버스 · 유화, 22×29㎝, 파리 · 루브르 박물관

 

급격히 경직되는 사회 분위기

사회는 급격히 냉각됩니다. 온건 자유주의자들은 참혹한 상황에 가슴 아파했지만 온건히 대응했습니다. 사회주의 지도자는 상당수 망명하거나 재판에 회부되어 추방당합니다. 

과거 ‘왕당파’였던 ‘질서당‘이 잃었던 세력을 회복하며 정국을 주도합니다. 치열하게 경쟁했던 귀족세력과 부르주아는 ‘사회 안정‘이라는 목표 아래 뜻을 함께합니다. 그들은 혼란한 국가를 위해 학식과 덕망을 갖춘 지도자들이 나서야 한다는 소명을 공유합니다.

다수의 자유주의 정치인이 질서당에 합류며, 의회에서 개혁 성향의 자유주의 세력은 소수가 됩니다.

 

‘대통령’에 출마한, [키질하는 사람] 구매 정치인

12월 대통령 선거

질서당은 많은 상류층 + 왕정주의자들의 지지 속에서 세를 불려 갑니다. (보나파르트주의) 그들은 무리하게 ‘군주정 복귀’를 시도하진 않았지만, 정치 경력이 전무했던 ‘황제 나폴래옹의 조카‘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합니다. 그는 3년 후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삼촌처럼 황제가 됩니다.

사회주의 세력(산악파)을 대표해 대통령에 출마 사람은, 밀레의 [키질하는 사람]을 구입했던 ‘르드뤼 롤랭’이었습니다. 그는 힘이 빠진 사회주의 세력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5.07% 득표에 그친 ‘르드뤼 롤랭’ 

‘보통선거’ 도입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던 ‘르드뤼 롤랭’은 5.06%의 낮은 득표로 낙선합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밀레가 누구를 지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유권자가 된 사람들이 누구를 선택했는지는 모두가 알 수 있었습니다.

농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나폴레옹의 조카’

이번 선거에서도 농민의 지지는 결정적이었습니다. 정치 무대에서 실력을 보여준 적이 없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농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당선됩니다

  • 74.31 % –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Louis-Napoléon Bonaparte : 보나파르트주의 (Bonapartiste 나폴레옹 시대로 돌아가자!)
  • 19.61 % – 루이-외젠 카베냑 Louis Eugène Cavaignac : 온건공화파
  • 5.07 % – 알렉상드르 오귀스트 르드뤼 롤랭 Alexandre Ledru-Rollin : 산악파 (급진개혁)

 

이념논쟁에 휘말리는 ‘농민 화가’ 밀레

농촌 사회에 퍼져가는 사회주의

범보수세력이 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하며, 사회주의 정치인들은 더욱 힘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농촌에서 조금씩 확산되어 갔습니다. 집권 세력이 외친 ‘사회 안정’은 그 외의 크고 작은 외침들을 잠재우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특히 사회주의가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사회주의자로 지목된 ‘밀레’

사회주의 세력에게 지지받았던 밀레의 ‘농민 그림’은 이내 정쟁의 대상이 됩니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을 우리에게 선물했다’고 밀레를 치켜세우던 언론들이, 이제는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며 밀레를 공격합니다. 같은 그림이 ‘평화’와 ‘혼란’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으며 논란의 중심이 됩니다.

하지만 밀레는 스타일 고수합니다.
[씨뿌리는 사람]이 발표되자 더욱 강한 어조로 밀레를 비난하는 말들이 쏟아집니다.

 

→  밀레의 <이삭줍기>에 쏟아진 비난, ‘사회주의 혁명’을 부추긴다!  (다음 글,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