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밀레 이야기 : 정치인들이 주목하다 02-1

 

정치인들이 주목한, 밀레의 [ 키질하는 사람 ]

밀레의 성장 이야기에서 이어진 글입니다.
← 성공을 안겨준 [ 키질하는 사람 ]

 

프랑스 내무장관이 구입한 밀레의 그림

1848년 2월, 프랑스는 혁명으로 다시 왕을 몰아냅니다. 같은 해 3월, 혁명의 혼란 속에서 열린 살롱전에 밀레는 2점의 그림을 출품합니다.

그중 [ 키질하는 사람 ]이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리고 길었던 무명 시절에 보답하듯 [ 키질하는 사람 ]은 500프랑이라는 높은 가격에 거래됩니다. 그림을 구입한 사람은 혁명 후 새롭게 구성된 임시정부내무장관이었습니다. 고위 행정 공무원이 공개적으로 그림을 구입한다는 건 많은 정치적인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 정치적 메시지의 중심에 2월 혁명의 주역 ‘농민’이 있었습니다.

 

혁명의 성과에서 소외된 농민들

도시에 집중된 혁명의 성과들

지난날 혁명의 주도 세력은 부르주아들이었고 그들이 이루어낸 성과의 많은 부분이 도시 부르주아의 삶을 개선하는데 집중됩니다.

사회 발전의 주역, 부르주아

과거 (1789년 프랑스 혁명) 경제력을 장악하며 귀족의 권위에 도전했던 부르주아들은, 어느덧 (1800대 초~) 자신들이 장악한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중산층 쁘띠 부르주아 petite bourgeoisie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들의 재산 차이는 현격했지만, 자본가라는 의식을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사회 발전의 주역임을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노련했고 성실했습니다. 위기 때마다 연합해, 도시 노동자의 분규와 농촌의 폭동을 제압합니다. 도시의 엘리트 정치인들은 도시 빈민의 소요 사태 못지않게 농촌의 봉기 또한 정치적으로 잘 활용했습니다. 본인들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조금씩 양보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을 관리했습니다.

‘모든 국민이 부유한 세상’을 꿈꾸며 … 그러나 

그 시대 자본가들을 악당이라고 단정지으면 곤란합니다. 자신의 배만 채우는 이들도 있었지만, 선한 마음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성실함이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꿀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결과 못지않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쉽사리 자신들의 방법을 수정하지 않았고 부작용에 직접 피해를 당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은 쌓여갔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본가들은 악하기 보다 어리석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신념을 너무도 맹신한 어리석음으로 많은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내몰린 현실을 살피지 못하고 맙니다.

 

미래의 꿈보다 오늘의 품삯이 더 중요했던 농민들

그들이 내건 ‘모든 국민을 부유하게 wealth of nation 국부론’라는 명분의 순수함과 그들이 이루어낸 제도의 개선들은 칭찬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진 많은 혜택 중 도시빈민과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너무도 적었습니다. 도시 중산층들은 미래를 설계하며 꿈을 실현해 갔지만, 도시 빈민들과 농민들은 불안정한 삶속에서 장례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미래의 설계보다 내일의 품삯이 더 중요했습니다.

도시가 주인공이던 시대였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프랑스 전체 인구 중 도시 인구 비율 : 1800년 – 8.8%, 1850년 – 14.5%, 1890년 – 25.9%

농촌에서 경작된 작물들이 도시 사람들의 배를 불려줬지만, 농민들의 주머니가 불어나진 않았습니다. 도시의 부르주아들은 농촌에도 투자했고 점차 토착 지주와 경쟁하게 됩니다. 농노제는 폐지된 지 오래였고 농장의 주인은 합리적인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농민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영농은 혁명 전보다 더 줄어갔고 토지는 지주와 자본가들에게 더욱 집중되어 갔습니다.

 

새로운 농민의 등장 : 백성 → 시민

도시는 많은 사람들로 포화상태였지만 여전히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습니다. 또한 도시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빈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었습니다.

1846년 흉작 → 1847년 식량 부족 → 도시의 물가 폭등

저임금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불만은 쌓여 갔고 1846년 유럽을 덮친 흉작으로 폭발합니다. 1847년 식량 부족으로 도시의 물가는 폭등합니다. 별다른 대책이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왕과 행정부는 도시 중산층의 지지마저 잃게 됩니다.

도미에_봉기_1848년 2월 혁명
오노레 도미에 [ 봉기, L’Emeute, 1848, 캔버스 · 유화, 113×87.6㎝, 워싱턴 · 필립스 컬렉션 ]

도미에는 당시 상황을 다양한 그림들로 남겼습니다. 전형적인 인물 표현을 벗어난 도미에 만의 개성 있는 인물들은, 밀레를 비롯한 많은 화가에게 영향을 줍니다.

 

거세진 노동자 · 농민의 선거권 확대 요구

노동자와 농민은 국가의 구성원일 뿐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국가 정책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노동자와 농민은 시민의 권리인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옵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했고 ‘파리 마들렌 광장 공개토론회’는 무산됩니다. 사태는 대화가 아닌 폭력이 행사되는 상황으로 변합니다. 파리 시민들은 골목 곳곳에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정부군에 맞섭니다. 군의 발포로 52명의 시민이 사망하자 군중의 분노는 더욱 폭발합니다. 파리는 1500개의 바리케이드로 뒤덮입니다.

결국 2월24일 국왕 ‘루이 필리프’가 퇴위하고, 2월25일 임시 공화국이 선포됩니다.

1789년 대혁명에서 시민의 힘을 보여준 이들은 도시의 부르주아들이었고,
1848년 2월 혁명에서 거대한 시민의 힘을 보여준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습니다.

‘보통선거’ 법안 통과

노동자와 농민들은 큰 목소리로 자신의 힘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힘을 하나로 모으는 조직을 형성하진 못했습니다. 대신 ‘보통선거’ 도입을 추진하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에게 그 힘을 실어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 남성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됩니다. (1848년 3월 5일)

 

밀레 그림의 뚜렷한 주제 = ‘농민’

2월 혁명은 부르주아 정치인들에게, 시민으로 성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힘을 확인시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밀레의 ‘농부 그림’이 살롱전에서 호평을 얻으며 주목을 받습니다.

밀레 _키질하는 사람 _ 1848년 2월 혁명
장-프랑수아 밀레 [ 키질하는 사람, Un vanneur, 1847~8, 캔버스 · 유화, 100.5×71㎝, 런던 · 내셔널 갤러리 ]
‘일하는 사람’에게 집중된 밀레의 시선

정치인들은 밀레가 그린 ‘농민’을 세심하게 살펴봤습니다.

인물의 얼굴도 일하는 장소도 단순하게 처리되었지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밀레의 관심은 ‘키질’이라는 행위 = ‘노동’에 집중 되어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화면 속 ‘일하는 농민’은 그동안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처럼 조연이 아니었습니다. 흡사 신화의 주인공이나 역사의 주인공처럼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밀레의 그림 속 농민은 당당히 주인공이 되어있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빠르게 알아차립니다. 밀레의 ‘농민 그림’이 자신들을 ‘친 농민 정치인’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유효한 아이템이라는 것을

 

밀레의 [ 키질하는 사람 ]을 구입한 정치인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 밀레의 ‘농민그림’ & 184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